사생 기행
박경진은 사생 중 만난 자연의 정취를 산수를 통해 표현하며, 사실적 묘사보다는 현장의 감각과 감정을 담아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그린다. 그의 작업은 사실적 재현을 넘어서, 자연과의 비가시적 상호작용을 기록하는 감각의 지도로 기능한다. 풍경은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장이자 감각의 흔적으로 구성되며, 그 흔적은 다시 하나의 지형이자 궤적으로 드러내며 작업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다.
2025.4.파주
2025년 4월 11일
<두발자국>
점점 느려지는 열차는 바람이 북쪽으로 이끄는 곳으로 도착을 했습니다. 메마른 봄의 공기와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있는 봄의 땅이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다른 곳과 두 발자국씩 느린 봄을 맞고 있는 이 곳의 평원은 바람이 계속 붑니다.
산수유도 개나리도 자그마한 꽃봉우리를 가지고 강가의 바람과 고속도로를 지나가는 매서운 차들의 속도 흔들리는 이 유약한 평원은 너무나도 평화롭습니다. 강가로 내려갈 수 없는 철조망과 강 너머 쉽사리 갈 수 없는 제한 지역의 표시와 대비되는 풍경이었지요. 철조망을 따라 피고 얽힌 덤불을 그리며 넘어 갈 수 없는 강가를 바라봅니다.
오늘따라 뿌연 공기는 뜨거웠습니다. 아직 다 피지 못한 꽃봉오리, 이제 막 피어 해를 바라보는 새싹을 다 그려갈 때쯤 등은 너무나 뜨거워졌어요. 장소를 옮겨 나루터로 왔을 땐 아까 와는 다른 평안함이 있습니다. 강가의 절벽 바위는 이 지나가는 시간과 바람은 맞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바위에는 아주 촉촉하고 작은 이끼와 덩굴, 메마르고 만지면 부서지는 이끼와 덩굴이 섞여 있는 듯하네요. 풍화된 시간을 만지며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넘어가는 상상을 하며 절벽에 가만히 앉아있었습니다. 저 강 너머에도 풍화된 마음은 존재하는지, 저긴 두 발자국씩 빠를지, 느린지를 생각하며 다시 돌아갑니다.
2025.5.북한산 비봉
2025년 5월 23일
<회갈빛의 바람>
미처 준비하지 못한 옷차림으로 올려다 본 비봉은 막막하기만 합니다. 어스름한 회색빛의 하늘은 비가 내릴 준비를 하는듯 해보입니다. 오늘의 하늘은 유달리 바위를 미끄럽게 만듭니다. 능선 위로 부는 바람은 빠르고 날카롭게 부는데 이런 미끄러운 바람은 자꾸만 제 발목을 채 갑니다. 사모바위 아래의 틈 사이 나부끼는 들풀의 움직임이 방금까지 바위를 오르려고 애쓰던 나의 모습 같습니다.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나부끼는 풀을 만지고 싶은 마음은 바람에 부탁해 손끝에 살짝씩 스치고 있습니다.
다른 바위 틈으로 내려가 소나무의 등치에 기대 종이 위 지나가는 개미를 보았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에 작은 한숨을 쉬고 나뭇가지에 달린 솔방울을 그리던 찰나 뒤에서 숨소리가 느껴졌습니다. 나무들 사이로는 까마귀 한마리가, 제 등 가까이 누런 들개 한마리가 절 보고 있었습니다. 쌀쌀한 바위 위에 사는 녀석들은 가만히 앉아 그림을 그리는 이에게 오늘 배를 채울 무언 갈 얻어먹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누런 들개는 덩치만 있었지 매말라 배가 홀쭉했습니다. 들개의 무섭고 간절한 눈빛을 보자마자 흠칫 놀라며 붓을 떨구니 들개는 겁을 먹고 달아났습니다. 골짜기 아래로 급히 뛰어가고 나무 위 까마귀는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며 조금 더 자리를 지키다 날아가버렸습니다.
마지막 종이를 움켜쥐며 바위에 종이를 문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거친 화강암의 티끌을 따라가며 산 아래 서울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빽빽한 도시의 모습을 보니 오랜만에 정상을 올라온 것 을 깨달아 버렸습니다. 평소엔 정상이란 목표로 걷지 않았는데, 아니 목표를 정하고 산행을 한지 꽤 오래돼었기에에. 오랜만의 목표를 맞이한 오늘이 새로운 날입니다. 오랜만의 새로운 날은 이제 정말 비가 내릴 것 같습니다. 오늘은 참 쌀쌀한 날이었습니다.
2025.6.독바위
2025년 6월 20일
<사라진 그림>
차 본넷을 튕기는 세찬 비를 타고 도착한 이곳은 독바위입니다. 무자비하게 잘려나간 바위의 모습을 보아하니 원래의 형태가 궁금해졌습니다. 천년 전에는 항아리처럼 둔탁하게 둥근 모습이었을지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바위 위로 가는 계단이 자연스럽게 발 걸음을 이끕니다. 오솔길에 들어서자마자 비가 다른 소리를 덮을 정도로 세차게 옵니다. 종이 위 선을 그으면 사라지고 물감을 짜면 금방 물이 차올라서 팔레트 밖으로 도망갑니다. 드로잉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이 순간마저 계속 사라지고 있습니다. 다시 꺼냈을 때 그림은 사라져 있겠지만 꿋꿋하게 선을 그어 마무리를 합니다.
바위 위에 올라가니 비는 차츰 옅어지고 안개가 살짝 바위 옆에 앉아있습니다. 안개 밑으로 똑같이 생긴 빌라의 지붕이 수백개가 나열된 모습을 보니 약간 어지럽습니다. 인위적인 이 정상을 벗어나고 싶어져 빠른 걸음으로 내려왔습니다. 다시 오솔길을 보니 옅어진 비에 다시 급하게 움직이는 청설모를 만났났습니다. 그 시선을 따라가니 축축하게 젖어 있는 고목을 발견했습니다. 채집을 위해 다가가 만져보니 축축하게 젖은 나무는 예상과는 달리 단단해 부러지지 않습니다. 손톱 틈 사이로 잔여물만 남긴 채 젖은 화구들을 보자기에 감싸 우중 사생을 마무리합니다. 젖은 옷가지를 손 바람으로 간신히 말려보면서 다시 차 본넷 위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며 눈을 감습니다.
2025.7.전주 건지산, 오송제
2025년 7월 7일
<검은 아지랑이 속 푸른 마음 한 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더위의 여름날 마지막 사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간 내리지 않은 비 때문일까요? 아님 더운 뜨거운 날이 이어져서 그런 걸까요? 아직 연 꽃이 다 피지 못했습니다. 검은 습지와 연못 밑에는 팔뚝보다 큰 잉어들이 헤엄쳐 지나다니면서 연 잎과 연밥 사이에서 물길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물 위 소금쟁이들의 움직임에 연못은 계속 움직이는 모양새입니다.
검은 물 위로 푸릇한 개구리밥을 하나씩 점찍어가며 종이 위를 푸릇한 터치로 채워나갑니다. 볼이 뜨거워질 때쯤 작은 바람이 눈가를 스칩니다. 물가의 윤슬을 쳐다봐서 살짝 시린 눈으로 다시 연못을 도니 연 잎 사이로 작게 피고 있는 꽃봉오리를 만났습니다. 올해의 여름은 가혹하게도 건조하고 뜨거웠는데 연 잎과 꽃은 올해도 어김없이 피기 위해 서로의 잎을 제치고 위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마 다음 주에 오면 만개해 있을까요? 그 사이 폭우라도 와 이 모든 걸 꺾어 놓으면 어떡하지 라는 마음이 들며 정자에 앉아 이 연못에서의 시간을 기다립니다.
연못을 나와 편백나무 숲으로 이동하는 길은 너무나도 뜨겁습니다. 아스팔트 도로는 쉼 없이 끓고 있는 가운데 사람마저 익기 전에 편백나무의 그늘로 들어왔습니다. 일자로 빽빽이 하늘을 막아주는 이 오솔길은 오늘 보냈던 시간 중 가장 시원한 시간이었습니다. 구석에 대나무 사이에 부러진 편백나무의 밑동이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간 순간 수많은 모기에 물려버렸지만 지금 이 순간의 고목을 보는 여름날은 다신 돌아오지 않는 날이니까요. 다시 숲을 바라보며 우리 주위를 얼쩡대는 청설모를 바라보며 지난 4월부터의 사생을 회상합니다.
기다림과 의문의 발견을 한 이 기행은 너무나도 길었습니다. 매달 새롭게 받아들이는 다른 환경들이 부담스러웠습니다. 남들과 다른 속도와 흐름을 참아내고 같은 흐름을 타는 일을 한 이번 봄과 여름은 저에게도 색다른 도전이었습니다. 아마 당분간은 다시 혼자서 사생을 하겠지만 다른 이를 기다리며 멈춰 선 순간, 채집을 하고 하염없이 앉아 풍광을 바라본 시간은 드로잉과 일지에 고이고이 간직할 것입니다.
늘 그렇듯 사생의 순간은 다신 돌아오지 않는 무형의 것이니, 눈과 마음에 담아 가야겠지요. 힘들었지만 그리 썩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4개월 간의 시공간이 합쳐서 다시 펼칠 가까운 시일을 기대하며 사생 기행을 마무리합니다.































